포스테키안

2017 겨울호 / 세상 찾기 Ⅱ / 평등한 과학을 위해 함께 걷는 길

2018-01-17 245

세상 찾기 Ⅱ / 평등한 과학을 위해 함께 걷는 길

평등한 과학을 위해 함께 걷는 길
March for Science에서 여성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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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http://hellodd.com/?md=news&mt=view&pid=61409(Ⓒ HELLODD)

내가 대학에 와서 가장 놀랐던 일은 캠퍼스 어디를 가나 남자가 존재하고 그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거였다. 중, 고등학교 내리 6년을 여학교에서 보낸 나로서는 상당히 적응되지 않는 일상이었다. 특히 ‘지은경’으로만 인식되었던 나의 존재가 이곳에서는 ‘여자 지은경’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무척 낯설게만 다가왔다. 여성이라는 나의 성별이 사회에서 이렇게까지 주목받는 요소였다니. 필연적으로 나는 젠더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동기 여학우는 그리 적은 수가 아닌데 여자 교수님을 찾는 건 왜 어려울까?’
‘화학 물질을 많이 다루는 나는 나중에 출산이나 육아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공계 여성으로 살아가는 어려움 몇 가지가 눈에 밟히고 나니 주변은 의문투성이였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고 진로의 갈림길로 내몰리는 고학년에 가까워질수록 나와 친구들은 밤새 기숙사에서, 주말의 어느 술자리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날들이 많아졌다. 우리들의 속앓이를 지난밤의 고민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았던 나는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그 원인을 보다 심층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페미니즘 스터디 그룹인 ‘포스텍 페미니즘’을 만들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목적으로 전국의 많은 대학에서도 페미니즘 단체가 생겨났다. 특히 이공계 내 젠더 이슈에 주목하기 위해 우리 학교, KAIST, UNIST, DGIST, GIST의 구성원이 모여 과학기술중점대학 페미니즘 연합인 ‘페미회로’가 탄생했다. 2017년의 어느 벚꽃 핀 주말, 포항에서 열린 페미회로 첫 모임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우리는 마음을 다해 기뻐했다. 각자의 학교 내에서만 존재했던, 페미니즘 위의 작은 연대가 다른 대학까지 확장되는 날이었으니까. 더 커진 연대감을 품에 안고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진 가운데 나는 ‘March for Science’라는 프로젝트의 담당자가 되었다.

March for science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반과학적 정책에 맞서 과학자들이 거리로 나서서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 의제의 중요성을 피력하는 행사이다. 전 세계 500여 개 도시에서 열리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여성 과학자를 주제로 부스를 운영하기로 했다. 마리 퀴리 이외에는 떠올리기 어려운 여성 과학자들을 찾아내어 사진전을 준비하고 고정관념을 뒤집기 위해 사회에서 흔히 남성의 것으로 여겨지는 공간과 물건에 그와 대조되는 핑크색과 보라색을 끼얹고 과학자들의 너드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메이크업 부스를 계획했다. 오로지 과학과 과학자를 주제로 하여 전세계의 과학자들이 거리로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까닭에 전 세계의 이목이 주목되었다. 관련 뉴스가 쏟아져나올 때마다 나는 부담감이 엄습했다. 단순히 여성만 이야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무려 ‘여성 과학자’라니. 연구실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퇴근 후 자기 전까지의 시간을 아껴가며 준비를 계속했다.

그렇게 하루씩 행사 일에 가까워지던 어느 날, 나는 뜬금없는 연락을 받았다.
“혹시 Science 인터뷰할 수 있나요?”
March for Science에 참여하는 참가자 중 17개국의 대표 한 명씩을 뽑아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추천되었다. 소수자인 여성의 시선으로 과학의 다양성을 다루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 중 여성과 과학 연구, 두 가지 당사자성을 모두 가진 사람은 내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무려 Science라니. 당혹 그 자체였지만 나는 오히려 이공계의 젠더 문제를 부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March for Science 운영위원장인 우리 학교 김승환 교수님의 도움으로 나는 Science 편집자와 직접 연락을 주고받은 뒤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와 더불어 행사 프로그램 중 하나인 스피치의 연사로 초대받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까지 얻게 되었다.

드디어 행사 당일, 어린아이들부터 나이 많은 어르신들과 다양한 국가에서 온 외국인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세종문화회관 앞을 가득 메웠다. 하얀 천막 사이에서 핑크색으로 가득한 우리 부스는 각종 장식물이 어우러져 한눈에 띄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종이 자동차에 핑크빛, 보랏빛 락커를 뿌리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여성 과학자의 존재에 놀라며 다채로운 메이크업과 새하얀 실험복의 공존을 목격했다.

부스 진행에 전념하다 보니 순식간에 스피치 차례가 다가왔다.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 앞에 서 본 건 처음이라 눈앞이 아찔했지만 막상 입을 떼고 나니 평정을 되찾았다. 공대에 오고 다르게 느껴진 존재감, 이공계 여성들이 겪어온 불편, 다양한 과학을 위한 여성의 필요성까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며 공감하는 사람도,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에 놀라는 사람도 있었다. 발표가 끝난 뒤 진심 어린 박수가 울려 퍼졌고 오랜 시간 캄캄한 물 속에 가라앉아 있던 우리의 존재가 잠시 수면 위로 올라와 한 번의 날숨을 뱉은 듯했다. 우리는 이번 행사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화려한 외관 탓일 수도 있지만 비단 그런 것들이 아니었어도 우리는 눈에 띄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과학에 여성은 쉽사리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과 핑크색이 만났을 때, 무채색의 실험복에 유채색의 메이크업이 더해졌을 때 사람들의 머릿속을 스쳤던 괴리감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자신도 모르게 가지게 된 선입견을 인식하고 나서야 비로소 숨겨진 여성이 보인다.

이공계 내 불평등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주위의 따뜻한 사람들과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이 세계에서 느낀 불편함과 답답함을 비로소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본질적인 것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더욱 많은 여성들이 과학자를 꿈꿀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다양한 관점이 뒷받침되는 평등한 과학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존재를 드러내고 삶의 많은 지점에서 불평등을 인식할 수 있는 출발점을 만들어갈 것이다. 나 혼자가 아닌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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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지은경 화학과 학부 12학번 / 대학원 17학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