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테키안

2018 봄호 / 포스텍 에세이 /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과학기

2018-04-19 34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과학기술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다양한 수송, 통신 및 생산 수단에 힘입어, 인간은 물리적 거리와 육체 노동 능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어느 때보다도 먼 곳으로 여행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되었고, 힘든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과학기술과 자유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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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지금으로부터 꼭 200년 전인 1818년에 20살의 영국 여류작가 메리 쉘리가 쓴 소설이다. 당시의 과학기술 수준을 생각하면 쉘리의 상상력은 실로 경이롭다. 이 작품을 살펴보면, 요즈음의 인공지능이나 인간 복제를 다룬 수많은 이야기들 중 어떤 것도 쉘리의 상상력을 크게 넘어서지 못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너는 나의 창조자이지만, 내가 너의 주인이니 복종하라.”라는 말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자신의 피조물로부터 듣게 되는 말이다. 이 말에서 쉘리는 창조자와 피조물 간에 존재하는 매우 흥미로운 아이러니를 지적하고 있다. 요컨대, 과학기술은 인간의 피조물이지만, 때때로 인간은 마치 과학기술의 종이 된 것처럼 과학기술이 정해주는 삶의 양식에 따라야만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언제든 주인이 켜지라면 켜지고 꺼지라면 꺼져야만 하는 온-오프 스위치를 달고 있는 핸드폰은 그 주인에게 “생사여탈권”을 맡긴 종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우리가 가진 핸드폰을 언제든 마음대로 꺼 놓을 수 있을까? 어쩌다 핸드폰 전원을 껐다 하더라도 과연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핸드폰을 꺼 놓을 수 있을까?

의심 많은 애인이나 걱정 많으신 부모님이 있을 때, 실수로 핸드폰을 내 방에 두고 나가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전화를 꺼 놓고 있게 되면, 곧바로 “왜 잠수 타냐”고 나무람을 듣기 일쑤다. 언제든 누구에게든 연락할 수 있다는 것은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이 이룩한 눈부신 성과이지만, 즉시 연락이 되어야 하는 삶을 늘 유지하라고 요구 받는 것은 지독한 닦달이 아닐 수 없다. 잠시 꺼 놓은 전화는 늘 나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명령하는듯 보인다. “어서, 켜, 켜라니까!”

생각해 보면, 모든 선택에는 그 선택에 따라 누리게 될 자유만큼의 책임과 위험이 늘 수반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에서, 에릭 프롬은 자유에 따르는 책임과 위험을 회피하려는 심리 때문에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선택하기 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정한 삶의 방식에 자신을 맡기려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런 인간의 심리가 집단적으로 작용되어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 프롬의 주장이다.

나는 오래된 2G 폰을 고집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이런 고집을 피우는 것에 대해 그럴듯한 몇가지 이유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그냥 그렇게 “자유”롭고 싶어 이런 고집을 부린다. 그런데, 그 고집부리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다. 무료로 최신 스마트폰을 주겠으니 2G 폰을 이제 그만 포기하라는 전화가 걸려오고 또 걸려오는 번거로움을 견뎌야 하고, “오시는 길, 첨부한 지도 참조” 혹은 “행사 포스터 참조” 라는 문자 메시지와 함께 도착한 지도나 포스터 이미지를 확대 기능이 없는 2G 폰의 작은 화면을 통해 어쩌지 못하고 내려다 보며 느끼는 묘한 “소외감”도 2G 폰 사용의 자유를 고집하려면 견뎌야 하는 부담이다.

닐 포스트만은 “과학기술을 사용하겠다는 선택은 언제나 파우스트의 거래와 같다”라고 주장한다. 과학기술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가져가는 것도 있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과학기술이 우리에게 더 많은 선택의 기회와 가능성을 열어주어 자유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자유가 늘 과학기술의 발전만큼 신장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이 열어준 자유의 가능성에는 늘 다른 면에서 속박의 기능성도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어 내는 수단으로서의 과학기술은 종종 그 수단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불평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백신을 “선착순”에 따라 접종하기로 원칙을 정한다면, 그런대로 정의가 이루어진 듯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 불편부당해 보이는 “선착순”의 원칙도 이동할 수 있는 수단에서 개인간에 차이가 현저하게 있는 경우엔 불평등의 심화라는 불의를 낳게 된다. 자동차나 자전거와 같은 수단을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공존할 때, “선착순”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칼을 가진 사람과 총을 가진 사람 간에 “자유로운” 결투를 허용하는 것만큼 불평등이다. 그것은 불평등이다 못해 불의가 아닐 수 없다.

얼마전 국정 교과서에서 우리 근대사를 기술하는 문제를 논의할 때에도 그러했고, 또 요즘 진행되고 있는 개헌 논의에서 헌법 조문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에서도 그냥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그 앞에 “자유”를 넣어 “자유 민주주의”라 해야 할지를 놓고 진보와 보수 진영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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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을 사용하겠다는 선택은 언제나 파우스트의 거래와 같다.”

보수 진영에서는 북한의 “인민 민주주의”도 “민주주의”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뜻하지 않게 공산주의를 비호하게 될 수 있으니, “자유시장경제체제”의 중심 개념으로서의 “자유”를 민주주의 앞에 넣는 것이 우리의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 보다 적절한 표현이며, 헌법에 담아야 할 올바른 이념이라 주장한다. 이렇듯, 오랫동안 진보 진영의 이념이었던 “자유”가 이제 보수의 아젠다가 된 것은 어쩌면 보수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진보진영에 속한 사람들 보다 대체로 더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보수진영은 자유를, 진보진영은 평등을 외치며 서로 대립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본래 자유와 평등은 서로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이념이다. 자유를 떠난 평등은 전체주의로, 평등을 잊은 자유는 시장근본주의나 무정부주의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이 두 이념은 서로 정교한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바로 이 균형을 위해 자유와 평등 뒤에 박애가 프랑스혁명의 이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유된 수단으로서의 과학기술은 가진 자들을 자유롭게 하지만 가지지 못한 자들이 겪는 불평등은 심화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과학기술이 보다 널리 공유되어 더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했으면 좋겠다. 널리 나누어지는 과학기술을 통해 비로소 자유와 평등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여 마침내 박애의 이상을 실현하는 날이 어서 올 수 있다면 좋겠다.

글/ 장수영  산업경영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