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공 애린복지재단 이사장 (前 포항공대건설본부장) 인터뷰 ②
‘사람’으로 세운 대학 – 포항공대의 드라마
글|POSTECH Creators 김소현 (신소재공학과 2학년)

(좌) 대학건립착공식 정문 현수아치 (1985.08.17.) (우) 정문제막식 (1986.12.03.)
지난 8월 20일, 애린복지재단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에는 포스텍 설립의 주역이자 ‘사람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건물과 부지 이야기 너머에, 포스텍의 ‘사람’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초대 총장을 모시는 일, 세계 곳곳의 연구자를 설득해 포항으로 모셔오는 일, 그리고 원칙을 지키며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대학 설립의 절반이었다.
이대공 본부장이 가장 먼저 ‘급하다’고 느낀 일은 초대 총장 영입이었다. 여러 인사들의 자문 끝에 떠오른 이름은 김호길이었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버밍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미국 메릴랜드대 교수를 거쳐 LG가 운영하던 진주 연암공업전문대학 (현 연암공과대학교)의 학장을 맡고 있던 물리학자였다.
처음부터 길이 열린 것은 아니었다. 김호길 학장은 포스텍이 4년제 대학 설립 허가를 받을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이대공 본부장은 세 차례나 진주로 찾아가 설득했고, 마침내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POSCO를 직접 보시라.”
포항을 찾은 김호길 학장 가족을 위해, 이대공 본부장은 직접 마이크로버스의 마이크를 잡고 공장 견학을 진행했다. 용광로에서 쏟아지는 붉은 쇳물, 전로의 불꽃, 열연공장에서 쉴 새 없이 뽑혀 나오는 핫코일까지, 그 규모와 열기는 김호길 학장이 그간 보아온 풍경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좌) 김호길 학장 포스코 견학 (우) 박태준 회장, 김호길 학장, 이대공 본부장 만찬
견학을 마친 그날 저녁, 영빈관 백록대에서 박태준 회장, 김호길 학장, 이대공 본부장의 만찬이 이어졌다. 김호길 학장은 와인을 잔째로 기울이며 호언장담을 남겼다.
“포스텍의 건학 이념이 노벨상 수상과 고부가가치 연구라면, 둘 다 10년 내로 가능합니다”
그의 말에는 단순한 포부를 넘어 시 대학이 지향해야 할 ‘연구 중심 대학’의 방향성이 응축돼 있었다. 듣는 이의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자신감이었다. 이대공 본부장은 “등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박태준 회장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박태준 회장은 이대공 본부장에게, “어이, 괜찮지?”라 물으며 “초창기엔 김호길 같은 사람이어야 돼. 무조건 모셔”라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김호길은 마지막 관문을 남겨두고 있었다. 바로 설립 허가. 그는 끝까지 “허가가 날 리 없다”며 부임을 미뤘다. 며칠 후, 이대공 본부장이 전화로 포스텍 설립 허가 소식을 알리자, 김호길 학장은 믿지 않았다. 그날 9시, 포스텍 설립 허가 소식이 KBS 뉴스 헤드라인으로 방송됐다. 초대 총장을 모시는 일은 그렇게 현실이 되었다.

(좌) 대학부지공사 착공식 후 김호길 초대총장과 박태준 설립이사장 (1985.08.17.) (우) 초대학장 김호길 박사 부임 (1985.08.01.)
초대 총장이 결정되자, 다음 과제는 교수단 구성이었다. 박태준 회장은 “국내 최고 수준의 대우로 모셔라.”는 원칙을 강조했다. 당시 국내 최고 교수 연봉 기준의 120% 수준으로 책정하고, 생활환경과 연구 여건 모두에서 최고 조건을 제시하되, 그만큼의 책임과 비전을 공유할 인재를 찾는 일이었다.
예우도 파격적이었다. 해외에서 귀국하는 교수들은 항공기 1등석으로 모셨고, 당시 김포공항에 도착하면 포항까지 헬기로 이동시켰다. 연구자들이 생활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곧바로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좌) 해외 교수 초빙 행선도표 (1985년) (우) 교수 초빙 출장길 비행기 속에서
김호길 총장과 이대공 본부장은 직접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을 돌며 교수 후보들을 만났다. 각 도시마다 포스텍의 비전과 철학을 전했고, 뉴욕의 한 호텔에서는 부부 동반 설명회가 길게 이어졌다. 설명회는 늘 같은 순서로 진행됐다. 먼저 포스코의 도전과 성취를 담은 다큐멘터리 <고난과 시련과 그리고 영광>을 상영하고, 이어 포스텍이 지향하는 건학 이념 ‘노벨상과 고부가가치 연구’를 공유했다. 김호길 총장은 설립 계획과 학사 운영 방안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어느 날은 새벽 2시가 넘도록 질문이 쏟아졌다. 마지막 질문자가 손을 들었다.
“다른 대학들은 교수 임용 때 찬조금을 요구하곤 합니다. 포스텍은 얼마를 내야 합니까?”
순간 분위기가 무거워졌지만, 이대공 본부장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절대로 그런 일 없습니다. 모든 서류는 재미한인과학자협회에서 검토하고 선발합니다. 우리는 돈으로 자리를 사고파는 대학이 아닙니다.”
이 한 문장 속에, 포스텍이 사람을 대하는 윤리와 원칙이 압축돼 있었다. 인맥보다 실력, 추천보다 절차를 중시했다. 실제로 교수 선발 과정은 재미한인과학자협회의 독립적인 검토를 거쳐 투명하게 진행되었다.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기도 했지만, 포스텍은 끝까지 공정성과 실력 중심이라는 원칙을 지켰다.

(좌) 교수초빙 활동 (1985.10. 독일 아헨) (우) 교수초빙을 위한 미국현지교수회의 (1986.01.)
그 결과, 포스텍의 첫 번째 교수가 결정됐다. 프랑스 콩피엔느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전영 박사였다. 연구와 교육 비전이 학교의 목표와 맞닿아 있었고, 새로운 대학을 함께 세우겠다는 의지가 누구보다 강했다.
(좌) 포항공대 교수 1호 이전영 박사 부임 (1986.03.06.) (우) 중진교수 부임 (1986.04.)
사람을 모으는 일은 결국 가치와 원칙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연봉 120%라는 숫자, 1등석과 헬기라는 예우, 찬조금 없는 임용이라는 기준, 외부 단체의 공정한 심사라는 모든 장치는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라는 하나의 일관된 맥락과 결을 함께 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노벨상, 그리고 고부가가치 연구”라는 목표를 믿었고, 그 믿음이 오늘의 포스텍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