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좋아하는 마음!
글|정혜인 (기계공학과 석박사 통합과정 재학 / 기계공학과 학 20, 화학공학과 복수전공)

졸업사진 (촬영: 컴퓨터공학과 원지윤 학생)
[로봇 덕후가 유체에 반해버린 사건.txt]
돌이켜보면 제 인생의 중심에는 늘 ‘덕질’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어떤 분야에 한번 빠지면 깊게 파고드는 감정, 그리고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단순하지만 강한 동기 말이에요.
포스텍에서의 학부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실 입학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 모든 관심은 ‘로봇’에 쏠려 있었습니다.
우연히 초등학교 5학년 때 ‘로보월드’라는 행사에 갔다가 로봇공학자 UCLA 데니스 홍 교수님을 알게 되었어요. 교수님의 글과 강연이 주는 매력에 푹 빠져들며 자연스럽게 로봇까지 사랑하게 된 케이스죠.

(좌) 학생참관단으로 참여한 미국 라스베가스 CES 2024에서 데니스홍 교수님과 재회했어요. (우) 초등학교 5학년 때 데니스 홍 교수님과 찍은 사진.
저는 원래 동물이나 곤충처럼 움직이는 존재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런데 로봇은 사람이 만든 창작물이면서도 실제로 움직이고, 제 의도대로 제어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 사람들의 일상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확신, 그 덕심 하나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었죠.
그런데 학교에 와서 전공 수업들을 하나씩 듣다 보니 기계공학은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깊고, 단단한 학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열, 유체, 고체, 동역학으로 이어지는 4대 역학 기초 과목들은, 처음엔 어렵고 버거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 역학이라는 게 곧 이 세상을 설명하는 언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실험’에 대한 갈증도 한몫 했습니다. 일반고를 나와 직접 손으로 무언가를 해볼 기회가 많이 없었기에 대학에 오면 꼭 실험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게다가 20학번인 저는 코로나 비대면 수업 시기에 입학하다보니, 더욱 갈증이 커졌습니다. 당시 저에게 ‘실험’이란 비커에 무언가를 섞고 반응을 관찰하는 화학 실험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마침 생체 모방 로봇에도 관심이 많아, 생체 모방 연구를 하시는 차형준 교수님과 같은 분들의 연구를 보며 화학공학 복수전공을 결심했죠.
그렇게 시작한 화학공학에서 양자역학, 유기화학 등을 배웠고, 그 과정에서 응용하는 ‘공학’도 재밌지만, 조금 더 과학에 가까운 ‘역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어요. 그중에서도 제 인생의 방향을 가장 크게 흔들어 놓은 건 기계공학과 유동현 교수님의 ‘유체역학’ 수업이었습니다. 로봇만 바라보던 저에게 유체역학은 정말 뜬금없는 분야였어요. 더군다나 저는 수학 과목을 여러 번 재수강할 정도로 수학이 늘 어렵게만 느껴졌기에, 가장 수학이 필요한 유체역학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수업은 정말 재밌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업 중 잠깐 소개되었던 한 박사님 (지금 제 지도교수이신 김진태 교수님)을 뵙고는 완전히 반해버렸습니다. 그분의 연구, 유창한 영어 발음, 수업 방식, 그리고 최근 네이처 표지 논문을 장식한 ‘씨앗의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생체 모방 기술’! 그 문구가, 고등학교 때부터 자기소개서에 써왔던 주제와 정확히 겹치는 순간, 속으로 정말 크게 외쳤어요.
‘와, 이건 진짜 운명이다!’
그날 이후로 친구가 길에서 우연히 교수님을 마주쳐 만든 단톡방을 시작으로, 수업, 점심 식사, 강연까지 하루 종일 교수님 일정을 따라다니는 ‘덕질 모드’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교수님께 진로에 대한 고민이 담긴 상담 메일을 드렸어요.
“혜인 씨는 왜 이렇게 치열하게 사시나요?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인가요, 아니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는 과정인가요?”
조심스럽게 보낸 메일에 대한 답장에는,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는 질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질문을 받고 곰곰이 저를 들여다봤습니다. 제 원동력은 불안이 아닌 ‘재미’였습니다. 해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고, 무엇보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며 수많은 ‘느낌표’를 찾아내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거든요. 그래서 교수님께 “제 세상이 아직 좁게 느껴지기에, 더 넓게 바라보고 싶어 이것저것 도전하며 재미를 쫓고 있다”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교수님께서는 저를 ‘다방면의 조화를 추구하는 완전한(Complete) 삶’을 사는 사람 같다는 말과 함께, 연구자로서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드는 완벽한(Perfect) 삶 또한 모두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고 하셨죠.
그리고 이어진 마지막 한 마디가 제 심장을 뛰게 했습니다.
“현재 추구하는 세상을 넓게 바라보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세상을 더 넓히는 연구자가 되어보지 않으시겠어요?”
그 문장을 읽고, 호주 기숙사 방에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침 해외단기유학 프로그램으로 호주 University of Wollongong에 있었거든요. 그때 공기역학 수업을 들으며 연속체역학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교수님의 응원으로 확신을 얻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마음으로 파고들고 있는 이 공부가, 교수님과 함께라면 세상을 넓히는 연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요.
로봇 공학부터 물리 화학까지 관심사는 넓었지만, 결국 제 시선이 머문 곳은 그 중심에 있는 ‘과학적 원리’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현상의 본질을 깊이 파고드는 교수님의 연구 방향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분야와 방향이 잘 맞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 연구 참여를 시작했고, 지금은 같은 교수님 연구실에서 석박사 통합과정 대학원생으로 첫 학기를 마쳤습니다. ‘덕질’하듯 좋아하던 마음이, 실제 연구로 이어진 셈입니다.
[멀게만 보이던 교수님이, ‘사람’으로 다가올 때]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저는 자연스럽게 ‘사람’이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장면들이, 포스텍에는 꽤나 많이 있었습니다.
포스텍에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교수님들과의 거리가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교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말 한마디 거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다양한 전공 수업과 특론, 세미나, 학과 행사를 거치며 교수님들의 ‘연구자’로서의 모습과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조금씩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기계공학과에서 주최한 피자 Day 행사나 MT에서, 교수님들과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진솔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던 순간들이 특히 인상 깊습니다. 교수님의 포스텍 재학 시절 동아리 초창기 이야기부터, 한 번은 박사·포닥* 중 연구 분야가 바뀌게 된 이야기를 새벽 5시까지 밤새도록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논문과 강의 뒤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씩 엿볼 수 있었습니다.
*포닥: Post Doc, 박사후연구원

기계공학과 MT 단체 사진
‘ME아리’라는 학과 밴드 활동도 교수님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기계공학과 학부생, 대학원생, 행정팀 선생님, 교수님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밴드인데, ‘기계공학인의 밤’ 행사에서 교수님과 함께 무대에 서며 자연스럽게 더 가까워질 수 있었어요.

ME아리 2024 포스킹 & 2025 기계공학인의 밤 공연
지도 교수님과는 말 그대로 ‘덕질하듯’ 수업과 행사, 연구실 생활 곳곳에서 다양한 기회를 통해 수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연구 주제를 바라보는 시선, 질문을 던지는 방식, 학생을 대하는 태도까지, 배우고 싶은 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지도 교수님의 Tech-Review Tech-Talk 행사
융합 연구에서 ‘존중’을 바탕으로 사람들과 협력하는 방식에 대해 깊이 고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본받고 싶었고, 교수님이 계신 연구실에서는, 제가 생각하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창업도 해보고 인턴도 해봤는데, 결국 남은 건…]
사실 대학원 진학을 결정하기까지 수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노폴리스 캠퍼스, 아이코어 실험실창업탐색 프로그램, 과하게 매력적인 기술창업 경진대회(과매기), APGC-LAB 주관 비즈니스 플래닝, 테크리뷰 주관 아이디어톤 등 각종 창업 프로그램에 참여해보고, UGRP(학부생 연구 프로그램)로 연구를 해보고, SES 삼성전자 여름 현장실습에도 참여하며 회사 생활도 경험해보는 등 나름대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거든요.

(좌) 코로나 시기, zoom으로 실시간 송출되던 2021 과매기 창업경진대회 (우) 삼성전자 여름 현장실습 수료증
각각의 장점이 분명히 있었고, 그래서 더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결국 저는 돌고돌아 원리를 파고드는 걸 좋아하고, 덕질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수업을 듣고 전공책을 하나하나 직접 읽어가며 내용을 이해하고, 그 원리를 더 깊이 파헤치는 과정이 가장 즐겁더라고요. 창업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에도, 아이템 자체에서 기술적인 매력이 느껴져야 애정이 조금 더 갔고, 저의 시선은 항상 그 원리를 파악하고 원론적으로 성능 개선을 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컴퓨터 비전 기술을 통해, 각종 유연전자 소자 및 여러 디바이스에서 발생하는 제 3의 역학을 규명하고 원리를 정량화하여, 그 효능을 검증하고 최적화하는 연구를 하고 계신 지도교수님의 방향성과, 제가 좋아하는 방식이 잘 맞는다고 느꼈습니다. 앞으로도 의공학, 로봇공학, 재료공학 등과의 융합 연구를 통해, 다양한 환경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역학적 현상을 밝혀내고, 그 과정이 실제 기술 개발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덕질이 연구가 되는 순간, 그리고 앞으로]
덕질을 하다보면 괜히 더 찾아보게 되고, 괜히 더 오래 붙잡고 고민하게 되고, 남들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한 발 더 나아가게 되잖아요.
저에게는 그 ‘덕질하는 마음’이, 결국 결심하게 되는 느낌표이자 궁극적인 동기(motivation)인 것 같아요.
대학원생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하며, 아직은 부족한 것도, 모르는 게 많아서 두렵고 힘든 순간도 있습니다. 그래도 조금씩 성장하는 제 자신을 보며, 저는 ‘누군가를 동경하는 덕질’에만 머무르지 않고,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이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연구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지금 저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어쩌면 제 인생은 덕질로 시작해서, 덕질로 진로를 정하고, 덕질로 여기까지 온 셈일지도 모릅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설레고, 궁금한 것도 많고, 좋아하는 것들도 많으니까요.